19세기 캐나다에서 실제 있었던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넷플릭스 드라마 《그레이스: 희대의 악녀인가, 억울한 희생자인가?》는 관객에게 끝없는 질문을 던진다. 16세에 종신형을 선고받은 하녀 그레이스 마크스. 그녀는 주인을 살해한 악녀인가, 아니면 그저 이용당한 피해자인가? 기억을 잃은 그녀와 진실을 파헤치려는 정신과 의사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억압된 여성의 현실과 인간 내면의 이중성을 섬세하게 풀어낸 6부작 드라마. 심리적 몰입감과 미스터리의 조화가 일품이다.
🔹 "나는 기억이 나지 않아요" – 기억 속에 갇힌 희대의 범죄자
그녀는 16세에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살인자라는 이름과 함께. 하지만 그레이스 마크스는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드라마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그녀의 진짜 모습을 알고자 하는 한 정신과 의사의 시선을 교차시키며 전개된다. 정신병원과 감옥을 전전하던 그녀는, 조용하고 성실한 모습으로 오히려 살인자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미국에서 온 유명한 정신과 의사 조던 박사는 그녀의 심리를 파헤치며, 과연 이 여인이 괴물인지 희생자인지를 밝히고자 한다. 하지만 그녀는 말도, 감정도 쉽게 내비치지 않는다. 억눌린 듯 차분한 그녀의 태도 속에서 의사는 점차 혼란을 느낀다. 과연 이 여인의 진짜 얼굴은 무엇일까. 기억이 사라졌다는 건 방어기제일까,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지워진 고의적 상처일까. 드라마는 그레이스의 무표정한 얼굴 뒤로 복잡하게 얽힌 내면의 진실을 담담히 따라간다.
🔹 메리의 죽음, 그리고 그녀가 잃어버린 자아
그레이스가 하녀로 일하던 귀족 저택에는 메리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언니 같고 친구 같은 존재였다. 세상의 더러움을 알려주면서도, 세상이 언젠가는 변할 거라는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랑했던 남자에게 버림받고 임신까지 하게 된 메리는 위험한 낙태를 시도하다 목숨을 잃는다. 그 순간부터 그레이스의 기억은 끊긴다. 환청에 시달리고, “나는 메리야”라고 외치며 난동을 부리는 그녀의 모습은 진실과 망상의 경계에 선 인간 정신의 극한을 보여준다. 사랑과 상실, 트라우마가 한꺼번에 그녀를 덮쳤고, 결국 그녀는 진짜 자신을 잃었다. 메리의 죽음 이후 그녀는 또 다른 자아를 얻게 되었고, 그 안에서 자신을 보호하며 살아남는다. 그것이 의도된 것인지, 아니면 본능적인 방어였는지는 끝까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메리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그레이스라는 존재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전환점이었다는 것이다.
🔹 진실과 거짓 사이, 관객이 해석해야 하는 결말
드라마는 마지막까지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는다. 그레이스가 진짜 살인을 저질렀는지, 아니면 단지 목격자였는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그녀의 기억은 조각났고, 일부는 되살아났지만, 여전히 많은 부분은 흐릿한 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 심지어 그녀 자신조차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믿는 이야기가 진실인지 아닌지를 모른다. 조던 박사는 그녀에게 연민을 느끼며 빠져들지만, 마지막까지 확신하지 못한다. 관객 역시 마찬가지다. 그레이스의 고요한 눈빛에서 무엇을 읽을지는 오직 보는 이의 몫이다. 진실을 전부 말하지 않는 이 작품은 그래서 더욱 매혹적이다. ‘악녀’라는 낙인을 찍기에는 너무 인간적이고, ‘피해자’라고 하기에는 뭔가 설명되지 않는 수수께끼가 존재한다. 그리고 바로 그 중간 지점에서, 이 드라마는 강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끝까지 몰입감을 놓치지 않는다. 기억과 진실, 피해자와 가해자, 이 모든 개념이 교차하는 지점에 선 인물, 그레이스. 그녀를 통해 드라마는 “당신이 믿는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남긴다.